사용자 조건: 컴퓨터 에이전시와 행동

컴퓨터 사용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자율성agency-여기에선 자동화를 회피하기 위한 능력으로 정의됨-를 얻는 조건이 되는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편리함의 이름으로 이 세계의 논리에 접근 불가능할 때 무엇이 사용자 주체성의 지평선이 되는가?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세상을 만들어보아야 한다.”

세자르 파베스, 알란 카이에 의해 1972년 인용됨

사물들의 세계

인간으로서 세계에 태어날 때 우리는 세계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 세계는 우리 이전에 존재하던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사람들을 관계하도록 하고 또 동시에 분리되도록 하는 요소들이다. 우리는 단지 이 요소들에 대해 숙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직조한다. 이 사물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노동하고, 일하며 행동한다. 원래 노동은 지속가능한 상품의 형태로 도출되지는 않는 '생계'를 위한 사적인 작업으로서 이해되었다. 대신 우리는 일을 통해서 영속성있는 것들을 직조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행동한다: 우리를 새로운 시작으로 이끄는 것들을 한다: 우리는 생명을 잉태하고, 정치에 관여하며, 직장을 그만둔다. 요즈음에는 일들이 꽤나 노동처럼 보이곤 한다. 지구의 과실들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싼 가장 영속성있는 유물들은 오래 지속되질 않는다. 개인은 이 세가지 행위를 행동의 범주에 따라서 배치하며, 이는 여기에서 반복적인 제스쳐로 이해된다. 노동은 순수한 행동이며, 일은 행동의 변주로서 보여질 수 있으며, 동작은 행동의 간섭(중단)이다. 동작은 "순전한 해프닝의 충실한 자동화"를 부수는 것이며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 대해 묘사한 바로 간결하게 설명될 수 있다.1

이 사례를 컴퓨터에 적용해보자. 만약 또다른 세계가, 세계 안의 세계라는 것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면 이는 컴퓨터 안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컴퓨터는 다른 매체와도 같이 사물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능력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시연(simulate)할 수 있기 때문에, 심지어는 다른 매체들을 시연(simulate)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안 맥네일은 "인터넷에 있어서는 은유(메타포)라는 것이 투박해진다." 고 짚어낸다. 왜냐하면 컴퓨터 네트워크의 네트워크인 인터넷은 근본적으로 다양체이며 분화하기(manifold and diverse)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은유를 사용해보자. 개별적인 어플리케이션, 웹사이트 그리고 온라인 플랫폼들은 대도시에 사는 것만 같다. 동네 전체와 기념물, 광장, 쇼핑몰, 공장, 사무실, 개인 작업실, 버려진 건설 현장, 워크숍, 정원-벽으로 둘러쌓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2 이 비유는 웹이 시작될 시점에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휴대 기기가 보편화되면서 덜 분명해졌다. 맥네일을 다시 인용하자면: "스마트폰이 온라인 및 오프라인 세상의 조직적인 경계를 흐리게 함에 따라, 공간적 메타포는 더이상 흥미롭지 않게 된다. 차량의 컵 홀더나 외투 주머니에 꽃혀진 모바일 하드웨어가 길을 차례로 안내할 때, 이동중에 계속해서 인터넷을 확인하는 와중에 어떻게 우리가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3 오늘날의 인터넷은 그리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용자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조건들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세속적인"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서 사용자들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정체화한 세가지 종류의 행위를 모두 수행한다: 그들은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하며, 그들은 대상을 직조하고, 또한 잠재적으로 동작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것 혹은 항상 해오던 것들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생성해낸다.

에이전시와 자동화

한나 아렌트에 의해 정체화된 세가지 종류의 행위중에서 동작action은 가장 폭 넓으면서도 모호하다. 장보러 가는 길에 지름길을 가로지르는 것이 과연 "순전한 해프닝의 충실한 자동화"를 부수는 행위일까? 새롭게 출시된 운영체제가 과연 "새로운 시작"에 부합할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동작"이 그 자신의 부정적이고도 반-행동적인 의미와 함께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율성을 긍정적으로 특정짓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 보다는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거라 본다. 에이전시란 본래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유용성, 조건, 행위나 수행력의 상태를 가늠한다는 의미이다.4 뭐든 좋다. 그러나 만약 방향을 전환하거나 특정 경로 안에서 프로젝트 포크를 생성하는 바로 그 힘을 평가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면 우리가 대체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한 행성이 갑자기 그것에게 부여된 궤도를 벗어나면 우리에게 이는 대리된 것으로 혹은 심지어 의도가 부여(내재)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나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선택이며, 에이전시는 선택하는 능력을 가늠한다. 선택이 없다면 반대로 이것은 행동이다. 중독자는 자신의 유독한 행동을 멈출 수 있는 선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택 의지(에이전시)가 거의 없긴 하면서도, 이는 무지하게 어려운 일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행위에 대한 수행력으로, 결과적으로 행동을 방해하기 위한 능력으로 에이전시를 정의하고 싶다.

Action vs Behavior
이 도판이 너무 행동적이지 않도록, 위의 텍스트는 편집 가능한 상태입니다.

다음은 플랫폼과 관련된 예시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지배적인 소셜 미디어 내에 사용자의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사용자의 자율성, 즉 이러한 플랫폼들을 그만 사용하도록 하는 능력을 제한 하는 것은 중독을 유발하는 기술과 사회적인 압박의 조합이다.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스크롤링의 자동화를 차단하는 것은 어려우며 또한 당신의 모든 친구와 동료들이 계정이 있다고 가정할 때 계정을 삭제하는 것은 더더욱이 어려울 수 있다. 이 경우에 낮은 에이전시는 자물쇠(lock-in)의 형태를 띈다. 자율성이 선택을 의미한다면, 진정한 선택은 페이스북이나 위챗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율성에 대한 실증적인 이해이지만 또한 매우 환원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 어느 시스템에서든지 작용하고 있는 에이전시들 간의 충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James Brindle의 표현을 빌려서, 이 텍스트는 컴퓨터 안에서 작용하는 자율성의 수프 속 오로지 하나의 재료(사용자)에만 집중할 것이다. 5

사용자와 비사용자

우리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을 "사용자"라 부른다.6 그러나 "사용"이 그러한 행위를 묘사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범주일까? 꽤나 포괄적(generic)이진 않은가? 뉴 미디어 이론가 Lev Manovich는 "사용자"란 상황에 따라 플레이어, 게이머, 음악가로 고려될 수 있는 누군가를 칭하기 위한 그저 편리한 용어라고 간결하게 주장했다.7 이 용어의 다양성은 본래 컴퓨터 선구자인 Alan KayAdele Goldberg가 컴퓨터란 메타미디엄, 즉 다른 모든 매체를 시연(simulate)할 수 있는 매개라고 언급한 데에서 비롯되었다.8 그렇다면 사용자에 대해 무어라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인터페이스 효과에서 Alexander Galloway앙 파상, 즉 사용자의 대척점에 프로그래머가 있고, 프로그래머는 행위하는 자이며 사용자는 그에 대해 행위하는 자라고 여기는 소프트웨어 이분법 중 하나를 짚어낸다. 9Olia Lialina 에게는, 사용자 조건이란 다른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시스템의 존재를 상기하는 것이다.10 Benjamin Bratton 이 분명히 하는 바 "실제적으로 사용자는 생물 유형이 아니라 대리인(agent)의 범주에 있다. 그것은 역할이나 필수적인 정체적이 없는 시스템 상의 위치에 있다. […] 사용자는 시발점이자 결과이다."11 Aymeric MansouxMarloes De Valk 는 UNIX 기반 컴퓨터에서 사용자가 일반적으로 이름과 거주지, 그리고 분명한 권한 세팅을 가지고 있는 반면 안드로이드와 IOS 사용자는 숫자 식별자를 가지고 그저 장님이자 이름없는 노숙인같은 프로세스와 같이 작용할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12

Christine SatchellPaul Dourish 는 사용자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발화하고자 하는 논증적인 구성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상호작용이 오직 사용의 형태만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철회, 무관심, 보이콧, 반란 등 비-사용의 형태도 포괄할 수 있는 가운데 그들은 너무 좁은 관점으로 이를 바라보았다. 13 우리가 자동화를 부수고 행동을 방해하는 능력으로서 에이전시를 정의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우리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비-사용자는 최대한의 의지(에이전시)를 소유하는 자이며, 기존 사용자보다 강력한, 어쩌면 해커보다도 강력한 자이다. 거절하는 능력(거부권, veto)이 권력과 상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불편해 해서만은 안된다. 종종 행동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나 애초에 그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특정한 특권을 배반하곤 한다. 자기 자식으로부터 소셜 미디어에서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빅테크 CEO를 떠올려보라.

개미들

Olia Lialina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사용자가 컴퓨터보다 우선적으로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사용자는 컴퓨터 기계가 어떻게 생겼고 인간과 어떻게 관계하는지 상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채웠다. 이 사람들은 선택 의지와 행위, 행동의 문제를 이미 의식하고 다루었다. 행위와 행동의 개념에 얹혀질 수 있는 구분은 창의적이고도 반복적인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후자는 기계화되기가 쉽다. 이러한 구분은 Vannevar Bush로 거슬러올라간다.14

1960년 정신분석학자이자 컴퓨터공학자 J. C. R. LickliderIvan Illich의 비평의 핵심 중 하나를 기대했으며15, 사람들이 기계에 의해 도움을 받기보다는 얼마나 자주 기계를 돕고자 했는지를 알아차렸다. 사실상, 자동화는 반semi-자동화 였으며 여전히 자주 그러하고, 따라서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 이 반자동화 된 시나리오는 단지 "기계적으로 확장된 인간"을 생성할 뿐이다. 반대 사례는 Licklider가 "인간-컴퓨터 공생" 이라 칭한 것으로, 인간과 전자 컴퓨터 간의 "진정한" 협력적 상호작용이다. 기계적으로 확장된 인간은 행위에 선행하는 결정이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행동주의적 모델이다. 인간-컴퓨터 공생은 좀 더 복잡하다. 에이전시는 사용자와 컴퓨터 사이의 진화하는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 안에 있는 듯하다. 인간-컴퓨터 공생은 인간과 컴퓨터가 이전에 결정된 프로그램에 대한 고정된 의존성 없이 결정을 내리고 복잡한 상황을 제어하는 데에 협력할 수 있게 할 것이다.16 사무적이고도 일상화된 업무로 이해되는 행동은 컴퓨터에게 맡겨지는 반면, 다양한 층위의 의사 결정을 의미하는 창의적인 행위는 컴퓨터와 인간 모두의 영역이 될 것이다.

Alan Kay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은 컴퓨터가 수단보다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컴퓨터의 기능은 차량이나 텔레비전과 같이 미리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종이나 점토의 경우와 같이 변형 가능하다. Kay에게는, 컴퓨터가 범용 장치여야했다. 그는 또한 누군가가 생성한 도구 및 자료와 같은 매체의 내용을 읽는 능력과 매체 안에 글을 쓸 줄 아는 능력을 포함하는 컴퓨터 활용 범주의 개념을 정교화했다. 컴퓨터 매체에 글을 쓰는 행위는 재료(material)의 생성뿐만 아니라 도구의 생성도 포함한다. 이것이 Kay가 말하는 진정한 컴퓨터 활용 능력이다. "인쇄 매체에서 생성할 수 있는 도구는 수사학적이다. 그것은 보여주고 설명한다. 컴퓨터 글쓰기에서 생성하는 도구는 프로세스이다. 그것은 시연simulate하고 결정한다."" 17

비교적 최근에 Shan CarterMichael Nielsen 는 증강 인공 지능 개념, 즉 인공 지능 체계의 사용이 지능intelligence를 강화한다는 개념을 도입했다. AI를 인지 아웃소싱outsourcing에 사용하는 정도로 제한하는 대신에 인지 변환transformation의 도구로 삼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AI는 인간보다 나은 성능으로 규모가 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오라클로서 작용하나 후자의 경우 AI는 우리가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작동 방식과 표현들을 변경한다.18

수십 년 동안 사용자 에이전시는 미리 정해진 행동으로부터의 자유, 기계에 의해 프로그래밍되는 대신 기계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능력, 의사 결정, 협력, 반복으로부터의 휴식, 기능적 자율성을 의미했다. 제한에서 비롯된 이러한 가치와 염려는 컴퓨터 개발을 추진한 과학이 도입된 이래 이미 존재해왔다.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인Norbert Wiener의 두려움은 파시즘이었다. 여기서 파시즘이란 독재 시대에 있었던 카리스마있는 권력 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보다 미묘하고 포괄적인 파시즘을 말한다. 즉 "인간의 비인간적 사용", 미리 결정지어진 세상, 선택이 없는 세상, 자율성(agency) 없는 세상 말이다.19 그가 1950년 서술한 바,

개미들의 공동체에서 일꾼 각각은 자신에게 적합한 기능을 수행한다. 병사 계급이 별도로 있을 수도 있다. 고도로 전문화된 몇몇은 왕과 왕비의 기능을 수행한다. 만약 인간에 이러한 공동체 패턴을 적용한다면, 개인들이 탄생에서부터 자신의 적합한 직업을 부여받기 위해 조건지어지는 이상적인 파시스트 상태에 살게 될 것이다. 지배자는 영속적으로 지배자이며, 병사는 영원히 병사이고, 농부는 농부 이상이 되지 못하며, 노동자는 노동자의 삶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Wiener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파시즘은 봉건제이다. 그가 묘사하는 이미지는 선택 없는 세상, 개인에게 부과된 기능의 작용 및 사용이 순수한 노동이 되고 비-사용자가 되기는 불가능한 세상. 파시즘은 비-사용 방지책으로 나타난다.

개인적이지 않은 컴퓨팅

80년대에 애플은 활기차고 코카콜라스러운 광고를 들고 나타났다. 전세계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최대한의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신들의 기계를 사용한다. 광고는 가슴 벅찬 슬로건과 함께 마무리된다. "가장 개인화된 컴퓨터". 몇십년이 지난 후, 개인화된 기기로서 컴퓨터를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 중 최초였던 Alan Kay는 컴퓨터들의 일반적인 현 상태, 그리고 특히 Apple같은 경우에 대해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20

Apple II Commercial
Apple II 광고 스틸컷. 1977?.

Kay에게 진정한 개인 컴퓨터란 완전한 읽고 쓰기 능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수십년동안 애플은 다른 방향으로 가는 듯 보인다. 컴퓨터 주변부를 운동화 한 켤레와 같은 라이프스타일 액세서리로 채우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비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려하는 욕구를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이 충족시켰다. 하지만 기기의 액세서리로서의 가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속감을 무시하지 말자.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놀기 위해선 해커스페이스로 가는 것만으로 충분해야한다. 다만 맥 대신 레노보(아니면 최근에는 Dell)를 들고.

하지만 애플의 액세서리로서의 컴퓨터는 읽고쓰는 능력을 현저히 저하시켰다. 애플은 창의력과 천재성을 미리 구성된 소프트웨어에 배치시켰다. Kay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애플의 창의성은 물질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가라지밴드로 작곡한 곡, 포토 부스에 있는 재미난 셀피 효과 등. 이건 대체 어떤 종류의 컴퓨터 활용 능력인가? 반-직관적으로, 소프트웨어 수단vehicle 안에서의 글쓰기 형태는 자주 컴퓨터 매체medium가 글을 읽는 방식을 취한다. 단순히 물질을 생성하지 않고 도구를 생성할 때에만이 우리는 컴퓨터 매체를 작성한다. 오해하지 말라. 모든 매체 글쓰기가 그래픽 인터페이스의 도움없이 구식 터미널 방식으로 일어나야 하는건 아니다. 컴퓨터 매체 글쓰기는 또한 엑셀에서 매크로를 디자인하거나 스크래치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다음 새 밀레니엄이 휴대용 기기와 함께 도래했다. 이 시점에서 읽기와 쓰기 사이의 공백이 극적으로 벌어졌다. 2007년 아이폰이 출시되었다. 2010년 아이패드가 출시되었다. 그것이 주된 특성은 컴퓨터 매체 글쓰기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쓰질 않는 것이었다. 웹 브라우징, 비디오 시청, 음악 듣기, 게임하기, 전자책 읽기 등. Dragan Espenschied21가 말한 대로 "기존에 프로그래밍 된 경로에서 벗어나는 방도인" 딱딱한 키보드는 스마트폰에서 사라졌다. 22 장치는 탈옥되어야 했다. 소프트웨어는 앱으로 분류되었다. 스크린은 점점 작아지고 인터페이스는 화면에 끼워 맞춰지려고 복잡성을 상실했다. Kay의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단순한 것들은 단순하게 머물지 못하고 복잡한 것들은 점점 불가능해졌다.

Google search for 'computer user'.
구글에 ‘컴퓨터 사용자’를 검색한 결과.

구글 이미지들은 우리가 여전히 모바일 이전의 컴퓨터 개념에 붙박여 있다는 것을 확실시한다. 일종의 상상의 스큐어모피즘이다. 우린 데스크톱 혹은 기껏해야 노트북을 생각한다. 대신에 우린 스마트폰을 생각해봐야 한다. 2013년 Michael J. Saylor가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훨씬 강력한 랩탑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데 태블릿 pc나 앱폰[우리가 지금 스마트폰이라 부르는]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머지않아 이 질문은 '실생활의 모든 면에서 사용하는 모바일 컴퓨터가 있다면 왜 랩톱 컴퓨터가 필요하냐'가 될 것이다."23 CNBC를 믿는다면 그가 옳았다. 최근 타이틀은 "2025년에는 전 세계의 인구의 3/4가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서 스마트폰만을 사용할 것이다" 였다. 24현재 미국에는 한 사람이 데스크톱 컴퓨터보다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Pew Center에 따르면 81% 대 74% 확률이다) 그리고 나는 세계적으로 이러한 불일치가 더할 것이라 생각한다.25 한 사람이 컴퓨터를 최초로 접하는 것은 pc가 아니라 곧 타블렛이나 휴대폰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이모가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컴퓨터는 스마트폰이다. PC세계는 모바일 우선 세계로 변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pc의 개인화가 변형된 또다른 방식이 있다. 개인은 개인화되었다. 과거에는 개인이란 단순히 기기의 소유뿐 아니라 이를 사용하는 방법, 사용자 각각이 스스로 개발한 자신의 노하우를 포함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음악 컬렉션을 통해 풍부하고 복잡 미묘한 디렉토리 및 파일 이름들을 우리 각자가 개별적으로 생각해내곤 했다. 크던 작던 이러한 노하우는 우리가 컴퓨터 안에 작은 대피소를 짓고, 또 자주 다시 짓도록 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개인이 개인화 될 때에 사용자 선호도와 행동에 대한 지식이 먼저 시스템에 등록된 다음 사용자 스스로에게는 이 지식이 낯설게 된다. 아이튠즈, 스포티파이, 유튜브 뮤직이라 불리는 하나의 음악 컬렉션이 있다. 아, 이것은 또한 엘리베이터 음악을 광고하는 형태의 일종의 쇼핑몰이기도 하다. 노하우로부터 사용자는 그들에게 꼭 맞게 재단된 경험을 선사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 지 모른다. 왜 우리의 소셜 미디어 타임라인이 꼭 지금처럼 정확하게 정렬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잘 모르지만서도 우리의 이전 행동에 기반한다고는 알고 있다. 왜 자동 제안 기능이 바로 그 단어를 우리에게 제공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여러 요인들의 조합이라고 가정하지만 어떤 요인인지는 알 수 없다.

자 이제 개인적이지 않은 컴퓨팅이라고 불러보자.26 그래도 될까? 개인적이지 않은 컴퓨팅의 특징: 진정한 읽고 쓰기 능력을 희생하는 컴퓨터 액세서리, 숨막히는 모바일 우선시, 친밀한 노하우의 박탈. 우리가 인정해야할 노하우는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 전술적인 기술은 균열 가운데서 등장한다. 작은 해킹, 기능features이 되는 버그들, 절충적인 워크플로우. Lialina가 말한 Turing-Complete User의 일상은 여전히 풍요롭다. 이 말은 즉슨, 우리는 추세를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경제적 생존을 위해 코딩을 배우도록 촉구되는 시대에 컴퓨터는 일반적으로 매체로서보다는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계급 없는 컴퓨터 세상의 유토피아는 정말이지 사용자들이 있고 코더가 있는 바로 그 유토피아로 드러났다.

토스터기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포괄적인 컴퓨터 활용 능력을 달성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Alan Kay 와 Adele Goldberg는 이를 알아차렸다:

시스템 설계 및 사양의 부담은 고스란히 사용자에게 전가된다. 이 접근 방식은 일반적인 사용자들이 특정 도구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부담 없이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우리가 매우 조심스럽고도 사려 깊게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제공할 때에만 작동할 수 있다.28

그러한 부담을 짊어지고 싶은 사용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이건 너무 무거울 지 모른다. 혹은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그 부담이 이전보다 무거워 보이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사용자의 욕망은 컴퓨터 매체 안에서 표현되진 않았다. 대신 욕망은 인터렉션 디자인의 통제된 설정 내에서 사전에 정의되었다: 이론적으로 예상되는 사용자의 여정과 해석된 사용자의 활동. '사용자 친화성'의 이름으로 많은 학습 곡선이 평평해졌다.

그것이 사용자의 진정한 욕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최소한 컴퓨터 과학자이자 사업가인 폴 그라함이 생각하는 바 그러하다. 2001년에 폴은 회상했다. "[…] 우리집 근처에 '불편할 바에는 죽음을' 이라는 범퍼 스티커가 붙은 차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에 할 일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그 선택이 무엇이든지 간에 택할 것이다." 이어서 그가 말하길:

당신이 데스크톱 컴퓨터를 소유할 때, 당신은 컴퓨터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미국 가정의 절반 이상이 컴퓨터 한 대씩은 가지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이메일과 계좌를 확인하는 데에 사용하려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 일년 전 쯤 어머니는 애플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고, 편지는 새로운 버전의 운영 체제를 구매할 때 할인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이나 계좌를 확인하려고 컴퓨터를 쓰고 싶을 뿐인 육십오세의 나이든 여자가 새로운 운영 체제를 설치할 지 생각해보라는 데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 일반적인 사용자는 "운영 체제"라는 단어를 알 필요조차 없다. "기기 드라이버"나 "패치"보다도 더 알 필요가 없다.

그럼 대체 누가 이 단어들을 알아야 하나? "그런 종류의 것을 잘 다루는 종류의 사람들". 그라함이 말했다.29 그의 비전은 Kay의 비전과 정반대에 있는 것 같다. 인용문에 스며있는 특정 연령대에 대한 차별주의를 감안할 때, 주저없이 Graham(현재 56세)은 자기 엄마가 정보 해방을 맞이하기를 훼방놓는 사람이라 프레이밍하고, Kay 쪽을 지지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답은 우리가 컴퓨터에 부여한 문화적 지위와 우리가 채택한 자율성 개념에 따라 다르다.

컴퓨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대로 표현한 모습.

그라함의 어머니의 경우에는, 그녀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그녀가 처리하길 원치도 않는 몇 가지 기술적 요구 사항으로 인해 덜 자율적이라고 말해질 수도 있다. 그녀에게는 컴퓨터가 토스터기보다 약간 더 똑똑한 정도로 작동하면 그만이다. 컴퓨터의 기술적 복잡성의 대부분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과 함께 그녀에게는 그저 생소할 뿐이다. 그것은 시간 낭비이자 걱정 거리, 부담이다. 게다가, 그녀는 기계를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운영 체제에 익숙해져야만 할 수도 있다.

한편, Kay의 비전을 염두에 두고 그라함의 어머니의 자율성이 "상류"에 침식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녀가 컴퓨터를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그것의 심오한 가능성을 잊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스마트 토스터로 사용하여 사회 전체가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Kay 쪽에 서라. 만약 이 상황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라함 쪽이다. 그렇지만 이 두가지 견해가 정말로 정반대의 것일까?

사물 인터넷 장치 중 하나인 실제 스마트 토스터를 생각해보자. 스마트 기기는 당신이 굽고 싶은 빵과 시간의 정도를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은 펌웨어를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토스트를 못하게 되었다. 펌웨어에 신경쓰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배를 쫄쫄 굶는다. 당신은 이를 학습하고 펌웨어를 업데이트한다. 그러자, 스마트 토스터는 이전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설정과 기능이 변경되었따.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당신이 기계의 업데이트 동작을 방해할 수 없기에 자율성은 감소된다는 점이다. 대신에, 당신은 당신의 행동을 수정해 이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라함의 어머니 사례로 돌아가서: 그녀가 힘들게 얻은 노하우, 그녀가 시간을 통해 캐주얼하게 개발해온 특정 도구에 대한 열망이 요구한 적도 없는데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도구는 완전한 매체는 되지 못했더라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각인된 것이다. 그녀는 습관을 만들었다. 습관은 자동화이며, 물론 행동적이다. 하지만 만약 "새 시작"이 밖으로부터 온다면 우리는 행위하지 않고 그저 적응된 행동만 있을 뿐이다.

크라우드펀딩으로 거의 20만 달러 정도를 모금한 스마트 이미지 토스터, 토스터로이
크라우드펀딩으로 거의 20만 달러 정도를 모금한 스마트 이미지 토스터,토스터로이.

다시 한번, 앨런 케이의 모토는 "단순한 것들은 단순해야 하고, 복잡한 것들은 가능해야 한다."이다. 위에서 우리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복잡한 것들에 초점을 맞췄다. 간단한 것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꽤나 자주 이것들은 그리 간단하지도 않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없으면 사용자는 어느 정도 미리 결정된 행동 패턴에 갇히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패턴을 개인적으로 적응하게 되면 노하우가 형성되곤 한다. 그 경우에 일종의 자율성이 패턴에 달라붙을 수 있다. 행동의 방해는 업데이트의 철회를 의미한다.

불편함

행동 패턴의 혁명은 종종 편의성, 즉 말그대로 할 일을 줄인다는 측면에서 팔린다. 일이 적다는 것은 결정해야 할 것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정은 마술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결정을 내리는 외부 개체에게 간단히 위임된다. 사실상 우리는 편의성을 자동화된 노하우나 자동화된 의사 결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결정의 위임을 내재적으로 나쁘다고 간주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컴퓨터의 주요한 특성인 프로그래밍 가능성을 비난하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편의성의 두가지 유형인 자동화된 편리함(지금부터 이를 단순히 편리함이라고 칭하자.)과 타율적인 편리함(이것은 단순히 불편함이라 칭하자.)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에서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이란 접근 가능하며 수정 가능하다. 후자의 경우에는 이러한 지식이 불투명하다.

선별된 피드를 생성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다양한 콘텐츠 소스를 수집하기 위해 컴퓨터가 읽을 수 있게 표준화된 형식인 RSS를 포함한다. 사용자는 접근과 변형이 가능한 목록에서 팔로우하고 싶은 피드를 수동으로 수집한다. 보여지는 영역은 대체로 시간 순서로 배열된다. 따라서, RSS 피드는 소스에 대한 사용자의 지식을 통합하고 각각의 블로그를 개별적으로 훑는 노하우를 자동화한다. 실제로 작업량이 적어진다. 이 경우를 편리하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트위터 피드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표시되는 콘텐츠는 사용자가 팔로우하는 연락처 목록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광고와 답글 기타를 포함한다. 표시 기준은 "알고리즘"이다. 사용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요소들에 기반해서 오로지 부분적으로 조작 가능하다. 이는 불편함의 경우이다. 사용자가 작동에 완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함은 자율적인 반면, 불편함은 행동적이다.

당신이 요구한 편리함은 이제 의무적이다.
Mark Vomit, 2020 (소스를 복원해준 nuagezero에게 감사를).

광범위하게 말하면, 알고리즘 피드는 RSS 피드 노하우를 대부분 없애버리고 자율적인 사용 방식을 무시한다. 따라서 복잡한 Overton 창은 감소한다. 오늘날 신규 사용자는 알고리즘 피드가 기본값인 세계에 던져지고 기존 사용자는 RSS 노하우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초심자는 그러한 전문성의 가능성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블로그는 RSS 서비스를 중단하고 피드 리더는 유지되지 않는다. Google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와 함께 Reader 제품을 중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Reader를 사랑한 만큼 당신이 앞으로 나올 대안들을 사랑해주길 바랍니다."30. 실제로 구글은 줄곧 웹 활동을 단순화해왔다. 2009년 코리 아칸젤이 말하길:

구글이 검색을 단순화 한 후, 넷 테크놀로지에 따라온 큰 혁신은 자체 퍼블리싱(전 세계 및 친구들에게)에 필요한 기술적 노하우를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호스팅과 ftp사용 및 권한 부여의 프로세스가 스트레스를 주고 혼란스러워지면서 조금씩 지워지고 우리가 현재 web 2.0이라 부르는 길을 열었다.31

대안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점차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라함이 대다수의 사용자가 일을 덜 하길 원할 거라고 말한 것이 옳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용자를 대신하여 시스템이 최대한 많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불편함은 자율적인 편의보다는 작업량이 적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불편함은 자율적 편의가 요구하는 일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RSS피드 URL을 수집하는 과정은 트위터의 흠없는 "추천"과 비교해 봤을 때 비극적일 만치 지루하게 나타난다.

Barack vs Mitch

우리는 트위터에서 타율적인 편리함의 어두운 이면을 경험할 수 있다. 사용자 Tony Arcieri는 트윗하면 일부만 보여지는 이미지 미리보기를 위한 초점 자동 선택에 대해 걱정스러운 실험을 설계했다.32 Arcieri는 두 가지 버전의 긴 세로 이미지를 업로드했다. 하나는 오바마의 초상화가 상위에 위치하고 미치 매코넬의 초상화가 하위에 위치했다. 두 번째 이미지에서는 위치가 반전되었다. 두 경우 모두 미리보기를 위해 선택한 초점은 매코넬의 얼굴이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누가 알겠는가!33 시스템은 사용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시간을 절약해주지만 이 때의 논리는 모호하고 불변한다. 여기서의 편의성은 타율적이다.34

Arcieri’s의 트윗 원본을 재구성함. 전체 이미지를 보려면 호버하거나 탭하시오.

꼭 이래야만 할까? 반드시 그렇진 않다. Mastodon 은 언뜻 보면 트위터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오픈 소스이자 자체 호스팅 소셜 네트워크이다. 많은 차이점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이 텍스트의 범주를 벗어난다. 미안.) 중 하나는 초점 선택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사용자는 자율적으로, 즉 수동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 어떠한 결정도 피할 수 있다. 이 경우 미리보기는 기본적으로 이미지의 중간 부분을 표시한다.

클릭하고, 스크롤하고, 멈추라

불편함은 자동화된 노하우이며, 노하우가 침묵의 절차로 바뀌고 사용자를 대신해 미리 정해진 일련의 결정이다. 이러한 유형의 편리함은 의식적으로 행동을 방해하는 힘든 결정들, 즉 마찰의 제거와 함께 진행된다. 구글 검색이나 DuckDuckGo 쿼리의 결과와 같이 페이지가 매겨진 항목 집합을 고려해보자.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자는 결과의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버튼을 클릭해야 한다. 그것은 행위의 최소한의 형태이며 따라서 마찰이다. 무한 스크롤은 구글 이미지나 레딧에서처럼 마찰을 제거하는 인터렉션 기술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마음의 작용은 균질화되고 흠없는 행동으로 변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유형의 인터렉션은 어느정도 구식으로 보인다. 무한한 웹페이지를 수동으로 스크롤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며 이게 구식이 아니라면 더 이상하다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이는 목록의 필요와 구조에 맞춰진 기계적인 제스쳐이다. 라디오를 듣기 위해 크랭크를 돌리는 것과 같다. 이는 아직 자동화되지 못한 자동화이다. 이 자동화는 링크를 클릭하는 것과 같은 이벤트를 산출할 수 없지만 리듬을 변조한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적이다. 사실상 이미 자동화되었다. 자동으로 재생되는 유튜브 재생목록이나 인스타그램 스토리(스냅챗에서 시작되어 페이스북 및 트위터로 퍼진 모델)를 생각해보라. 행동은 뒤바뀐다. 사용자는 엔진에 전원을 공급하지 않지만 대신 때때로 엔진을 멈춘다. 재생 목록 모드에서 "능동적인 상호 작용"(이론적으로만 장황한)은 예외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업 혁명과 유사한 진행 과정을 본다. 첫째, 일부 작업은 서로 연관이 없으며(하이퍼링크나 페이지 넘기기, 산업 이전의) 그들은 육체 노동과 기계 노동(무한 스크롤, 산업)을 요구하도록 짜여지고, 마침내 그들은 완전히 자동화되어 감독만을 필요로 한다(스토리와 플레이리스트, 스마트 팩토리). 페이지 넘기기, 무한 스크롤, 플레이리스트. 수동, 반자동, 완전한 자동화. 클릭하고, 스크롤하고, 멈추라..

사용자의 프롤레탈리아화
특성 플랫폼 팩토리
반복적, 반자동, 별 생각없는 제스처 무한 스크롤, 스와이프 조립
재배치 없는 움직임 피드 (사용자는 페이지를 떠나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 (노동자는 제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외부화되고 불투명한, 접근성이 없는 지식 (savoir) 알고리즘 (데이터를 목록으로 정렬) 산업적인 노하우 (부품을 개체로 정렬)

후기 프랑스 철학자 Bernard Stiegler 는 프롤레탈리아화의 개념에 중점을 두었다. 그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형태와 산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하우까지도 강탈당한다. 35 사용자는 풍족하고도 특수한 자기들만의 제스처를 박탈당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제스처는 완전히 쓸모없게 되기 전에 시스템의 논리에 적합하게 재구성된다. 제스처는 먼저 표준화된 다음 자동화된다. 무심코 스크롤하는 행위는 공장에서 제품의 부품을 조립하는 반복 작업과 유사하다. 작업자는 자신의 위치를 떠나지 않고 사용자는 페이지를 떠나지 않는다. 이 두가지 모두 재배치가 없는 움직임을 특징으로 한다. 더 나아가서 공장에서는, 기계들은 부품간의 기능적인 관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산업적인 노하우에 따라 구성된다. 우리는 이렇게 공장처럼 조직된 전산 시스템을 뭐라고 부를까? 이해할 수 없고 또 불변하게 만들기 이전에 우리는 이를 플랫폼이라 부르며, 사용자의 결정을 추출하고 균질화하는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플랫폼에서는 불투명한 알고리즘은 데이터를 목록으로 정렬한 다음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논리를 구현한다. 플랫폼 팩토리는 똑똑하고 역동적이며, 사용자-노동자는 멍청하고 고정적이게 된다.

초선형성

스크롤하는 동안 공상에 빠지지 않아 본 사람이 있을까? 미술 비평가 Jonathan Crary를 후원하는 Stiegler는 새롭게 프롤레탈리아화된 환경이 "수면과 공상 상태인 간헐성"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분간은 주의가 포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지는 않아서 간헐성이 우리 손아귀에 머무르는 듯 보인다. 무감각한 반복성을 지니고 완전히 행동적인 영역은 사실상 넋이 나가기에 적합할 것이다. 행동이 스크린에서 발생할 때 내용은 흐려지고 행위는 마음속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프롤레탈리아화된 상호작용의 일반적인 상태일 것이다. 마침내,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드를 스크롤링 하거나 스토리를 보는 인지적인 작업 가운데 휴식을 취한다.

ScrollTV의 홈페이지
ScrollTV의 홈페이지, 진실로 당신의 것.

프롤레타리아트화된 상호작용은 초선형적(hyperlinear)이다. 조립 라인의 일반적인 특성은 이름이 내포하듯이, 선형적이다. 조립 라인에 해당하는 정보는 목록이다. 독립형 컴퓨터와 네트워크 컴퓨터 모두 처음에는 인쇄기로부터 물려져 내려받은 품질인 목록의 선형성을 깨뜨릴 가능성이 강조되었다. E-문학은 이러한 혁명을 축하했다. 하이퍼카드가 설계한 소설은 단일한 기원이나 결론도 없이 많은 경로를 가지고 등장했다. 초기 웹은 하이퍼텍스트의 거대한 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함께 유지하는 것은 비선형성의 빌딩 블록인 하이퍼링크였다. 그러나 비선형성 혹은 다중선형성은 네비게이션이 뒤로 물러나지 않는 가운데 높은 수준의 인지 부하를 필요로 한다. 사용자는 클릭으로 실행되는 많은 결정들을 해내야 한다. 그러자, 웹 2.0이 도래했고 웹페이지는 보다 역동적이고 상호작용적으로 되었으나 또한 보다 행동적으로 되었다. 다중선형성은 AJAX기반의 편의주의적 드라이브에게 졌다. 결과는 초선형성이었다. 초선형성은 개인적인 사진, 기사, 토론, 여론 조사, 광고 등의 이질적인 콘텐츠, 소스 및 활동을 목록 형식으로, 네트워크로 선형화한 것이다. 물론 사용자는 여전히 클릭해서 자기 길을 갈 수 있지만, 이는 네트워크 공간을 활동적으로 누빈다기 보다는 제자리에서 티비 채널을 넘기는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 그리고 레딧으로 되돌아온다. 이는 초선형적인 채널 넘기기(zapping)이고, 모바일 컴퓨터의 구획화된 구조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Brendan Howell의 무한 동시대 장치
Brendan Howell의 무한 동시대 장치. 큰 마우스로부터 작은 마우스가 나오는 디테일.

채널 넘기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2012년에 스크롤TV를 만들었다. 스크롤TV는 muzak 사운드트랙을 재생하는 동안 소셜 미디어를 자동 스크롤할 수 있는 플러그인이다. 이 프로젝트는 1973년에 Richard SerraCarlota Fay Schoolman가 만든 동영상인 “Television Delivers People”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는데, 여기서 TV 시청자의 수동적인 역할은 방송 매체 자체의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인터렉션의 세미자동화에 대해 다소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많은 프로젝트가 있다. "틴더에서 대신 스와이핑 해주는"고무 손가락, 혹은 덜 미묘한 하나는, 회전하는 고깃조각을 대신 사용한다. Stephanie KneisslMax Lachner2017년 프로젝트에서는 물리적 자동화가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을 속이는 데 사용되지만 기계는 인간에 의해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세미 자동화를 반영한다. 보다 최근에는 Ben GrosserEndless Doomscroller를 만들었는데, 이는 모바일용으로 제작되어 소셜 미디어 상의 나쁜 뉴스만을 강박적으로 찾는다. 이 작업은 Brendan Howell의 이전 작업 무한 동시대 장치 (2012)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독보적인 뉴스 경험을 생성하는 휠 스크롤을 가진 거대 마우스로 구성된다. 마침내 2015년에는 크랭크로 작동하는 목재 기계가 달려있는 채로 2년간의 Tumblr 블로그 CLOAQUE 가 축구장 크기로 인쇄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육체 노동뿐 아니라 초선형성이 제공할 수 있는 창의적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즉, 다양한 시각 매체의 폭발을 위해 목록의 균질성을 활용한다.

자본주의 vs. 근대화

Shoshana Zuboff에게는, Norbert Wiener가 두려워했던 봉건 파시스트 사회가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신봉건주의로 설명하는데, 이는 보통 사람들의 통제를 훨씬 뛰어넘는 엘리트 부와 권력의 통합, 민주적 동의 매커니즘을 특징으로 한다."36 미국 학자에 따르면, 디지털 플랫폼과 스마트 디바이스 모두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추적되는 사용자가 생성한 "행동적 잉여" 에서 이익을 추출하는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에서 범인을 찾을 수 있다.

확실히 주보프의 "감시 자본주의" 구조는 표준화된 주의 함정에서 추출되는 논리를 포함하지만, 초선형성과 기술-프롤레탈리아화는 아마도 산업의 합리화 혹은 근대화의 단순한 결과일 수 있다. 이탈리아 이론가 Raffaele Alberto Ventura가 설명하기를,

근대화의 역동성은 사회 영역에서 기술 행정 영역으로 규제 기능의 아웃소싱이 증가하는 가운데 구성된다. 이전에 비공식적이고도 코드화되지 않은 전통적인 규범을 통해 관리되었던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특정한 계층의 "유능한" 개인에게 이전되고 이들은 경제학, 도시계획, 심리학, 건강, 공공질서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지시한다.37

우리는 이러한 규범과 행동이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구축하고 사용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에(제품, 서비스, 인터페이스와 상호 연관된)도 전달된다고 덧붙일 수 있다. 편리함은 합리화된 구조조정을 달리 부르는 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비율은?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근대화가 불가분의 관계라 말할 수 있다.38, 이는 옳은 평가일 수 있지만, 이 두 영혼을 구별하는 것은 감시와 추출에 대한 불편함이라는 한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우선시하는 데 도움을 준다.

스피드런

불편함은 제스처를 제한하거나, 선택을 최소화하고, 옵션을 줄이는 등 대상을 닫아버린다. 이것은 순전히 강압적인 노력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옵션, 선택 그리고 제스처가 시간적으로 비용을 많이 들게 한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앨런 케이가 사용자에게 주어진 시스템 설계 및 사양의 부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시간과 전문성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후자는 완전히 궁극적으로 시간에 연관된다.

추가된 각 옵션은 새로운 실행 가능 경로를 생성한다. 경로의 계층화는 시스템을 하나의 세계처럼 보이게 한다. 의미있는 것이 구축될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디오게임을 생각해보자.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같은 오픈 월드 게임은 풍경을 탐험하고 즐기며, 다른 방향들로 가서 길을 잃는 것에 관한 게임이다. 사람들은 이 게임에 수백 시간을 보낸다. (나는 70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역시30분 이내에 게임을 끝낼 수도 있다. 조용하고도 늘어지는 여행의 발견이 있는 한편, 스피드런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나는 컴퓨터 사용이 대부분 스피드런 모드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컴퓨터가 매체에서 도구(Kay의 말을 빌리자면 탈 것vehicle)으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지(여기서 컴퓨터란 스마트폰도 의미한다.) 주변 환경에 머물기위함은 아니다.(소셜 미디어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앞에서 보내는 지는 중요치 한다. 대부분은 읽기 수준에 머무르고, 매체 수준에서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에 다다르는 경우는 드물다. 사전 패키지 소프트웨어는 그 자신을 재 프로그래밍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우리는 콘텐츠와 상호작용한다. 읽고 쓰기 문제가 떠오를 때, 그건 버그나 골칫거리로 나타나고 시간만 잡아먹는다.

컴퓨터 용어로 범용성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개방된 세계의 성질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범용성이나 진정한 컴퓨터 활용 능력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는 사용가능 시간에 대한 숙고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구글 스트리트 뷰에서의 개인 정보 보호 문제에 대해 Joanne McNeil은 말한다. "한 사람-사용자는 기술이 널리 적용된 가운데 기술에 반하기가 영원히 어려워진다. 이는 일반화라기 보다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바쁜 삶에서 우선순위가 갖는 본질이다."39 사실상, 분주함이 우리 기술적 습관의 대부분을 결정짓는다.

Raphaël Bastide의 Freesnake, 2016. 이 작품에서 우리는 매체 수준(Bastide는 오리지널 Snake 게임을 비틀었고, 나는 Bastide의 코드를 비꼰다.)보다는 콘텐츠 수준(게임의 목적)에 머무르는 개방된 세계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제 컴퓨팅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용자가 자동화 대신 반드시 수동으로 작업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자동화가 반드시 불편한 것은 아니다. 진부한 표현에 따르면, 프로그래머/코더/괴짜는 손으로 작업을 수행할 때 요구되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반복적인 작업을 자동화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들은 내가 젤다를 플레이할 때와 마찬가지로 주요 임무에서 벗어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이게 럭셔리다.

넷스탈지아

오늘날 우리는 좋고 오래된 웹, 두툼한 데스크탑 컴퓨터, 요란한 56k 모뎀을 갈망한다. 우리는 넷스탈지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넷스탈지아의 시대는 사실상 이미 10년 동안 지속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브루탈리즘 웹 디자인이라는 혼란스러운 개념의 성공,40 네오시티(2013) 및 Tilde.Club(2014) 네트워크의 출시, 웹사이트에 적용된 가드닝이라는 비유부터 뉴에이지스러운 신앙과 신조를 섬기는 "HTML 에너지"까지. 2015년 아티스트이자 작가인 J.R. Carpenter는 "[무엇보다도] 느림과 작음이 레지스탕스의 한 형태임을 암시하기 위해 '핸드메이드 웹'이라는 용어가 태동했다."고 환기했다.41

<p>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우리는 향수를 느끼는가? 넷스탈지아는 정확히 하나의 미학이나 그것이 상징하는 바로 추정되는 순진한 시대(<i>인터넷은 결코 순진했던 적이 없다<\i>)와는 관계가 없으며, 기억에 의해 이상화된 시간, 편의 상충 관계가 그렇게 엄격하지 않은 시간, "시스템 설계와 사양에 대한 부담"이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함께 비교할 만한 더 빠른 것이 없었고 스피드런이 컴퓨팅의 기본값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측면은 진정으로 개인적인 경험처럼 여겨지는 것들로 추가되었다.</>

넷스탈지아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즉, 스피드런 모드와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개인은 자동화나 프로그래밍이 전혀 없이 손으로 작성한 HTML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의 결과로, "마찰"은 미화된다. 작동하지 않거나 시간을 너무 과하게 잡아먹는 것이 마침내 매그러운 인터페이스를 탈신비화하는 현현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좋은 것이 된다.

내 말을 오해하지마라, 난 HTML을 좋아한다. 나는 간단하고 손으로 작성된 웹사이트를 소중히 여긴다. 나는 빈곤한 미디어의 매혹을 이해한다.42 하지만 나는 컴퓨터가 1만번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한다. (콘솔을 확인해보라🤓.) 또한, 어느정도의 자동화는 핸드메이드 웹사이트를 만들 때 우리가 사용할 수도 있는 도구들에 일반적으로 임베드되어 있다. 우리가 진짜 DIY를 위해서 신택스 자동 완성을 거부할 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우리가 마찰을 위한 마찰을 찬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찰은 그 자체로 사용자의 좌절이기 때문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아함을 인식하고 우리 스스로를 위한 자율적인 편리함을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컴퓨터가 대신 결정을 내릴 가능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결정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프로그래밍 가능성은 여전히 컴퓨터의 핵심이며 여기에서 완전한 컴퓨터 활용 능력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넷스탈지아는 이미 이것을 암시한다. 어원적으로 노스텔지아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한다. 집의 개념이 결정적이다. 우리는 집안의 물건들을 편리하게 정리해서 우리 스스로의 일상을 창조한다. (누군가는 우리의 행동을 프로그래밍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일상 루틴은 생활에 안정감과 내구성을 제공한다. 토스터기를 기억하는가? 넷스탈지아는 미리 결정되지 않은 컴퓨터 동작, 미리 가구가 들여져있지 않은 집으로서의 컴퓨터에 관한 노스텔지아일 수 있다.

앱말고 자율성을

프로그래머 Bret Victor가 설립한 다이나믹랜드 는 Doug Engelbart과 Xerox PARC의 정신을 계승한 비영리 연구 그룹이다. 그들의 목표는 사용자들이 화면 상의 기호만 가지고 상호 작용하지 않고 물리적인 공간 내의 실제 사물을 가지고 상호 작용하는 새로운 컴퓨터 매체를 발명하는 것이다. 아까전에 나는 컴퓨터 활용 능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시간 문제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글쎄, 다이나믹랜드는 50년짜리다. 그럼 이제 수반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앨런 케이는 어느정도 이 프로젝트에 끼어들게 된다.

다이나믹랜드가 구상하는 새로운 컴퓨팅 매체는 장치가 아니라 공간이자 환경이다. 이 환경은 물리적이면서도 가상이다. 그것은 아릅답고도 공동체적인 혼란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사용자(아이들, 어른들, 노인들)은 종이와 장난감, 펜을 가지고 서로 상호작용한다. 다이나믹랜드의 사람들은 연대와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차용해서 그들은 이것이 "현실 세계와 같은 멀티 플레이어로서" 라고 말한다.

어떻게 참여를 독려하는가? 다이나믹랜드의 컴퓨터 미디어는 위협적이지 않고 결정화되지 않은 듯 보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터페이스가 계속해서 변하더라도 무언가 고정된 듯한 오늘날의 비개인적인 컴퓨팅과는 정반대이다. 다이나믹랜드는 "보통 사람들은 앱을 보고 '내가 만들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앱이 아닌 자율성을 원한다.

한 사용자가 데스크탑 컴퓨터에 머리를 때려박는 모습을 표현한 아이콘

다이나믹랜드의 매체와 달리 넷스탈지아스러운 홈페이지들은 "공사중" gif를 올려놓고 변할 것 처럼, 보이지 않는 업데이트의 유기적인 주기 안에 고정되지 않은 듯 보인다.43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고,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웹사이트들을 통해 우리는 불완전하고 따라서 새로운 시작에 열려 있는 세상을 물려받는다. 우린 스피드런 모드에서 수행되는 비개인적 컴퓨팅의 현재 행동에 갇힌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넷스탈지아적인 과거와 공동체적인 컴퓨팅의 미래 모두에서 자율성을 찾을 수 있다.


Acknowledgments

I’d like to thank Vanessa Bartlett, Marloes de Valk, Olia Lialina, Geert Lovink, Gui Machiavelli, Sebastian Schmieg and Thomas Walskaar for helping me out in different ways with this essay. The research process found its home on the Lurk instance of Mastodon (couldn’t have asked for anything better!), so I’d like to thank all Lurk users (as well as the ones from neighboring instances) for their patience while I was broadcasting my half-baked thoughts. Some of these users enthusiastically responded to my toots and thought along with me. This energized me and made my writing sharper. This is why I’m thankful to Brendan Howell, Aymeric Mansoux, Jine, David Benqué, Roel Roscam Abbing, JauntyWunderKind, Adrian Cochrane, Benjamin, Fionnáin, Luka, frankiezafe, paolog, Nolwenn and many many others.

This project inhabited also another home: the 2020 research group of KABK, generously orchestrated by Alice Twemlow. My gratitude goes to her and to my fellow researchers: Hannes Bernard, Katrin Korfmann, Vibeke Mascini and Dirk-Jan Visser.

As I was saying, I spent quite some read/write time on Mastodon while working on this. Since the beginning, I collected all the ideas and questions related to The User Condition under a mastodontic thread. This has been my mode of thinking out loud, so please don’t judge :)

The structured pieces of writing mostly ended up on my Entreprecariat blog. Here’s a list of the posts:

Oh, and one of them (my favorite) was also published on npc.cafe, a text repository about videogames.

Repository

Soon, maybe, I will make the code publicly available so take this as a note to my future self.


  1. Arendt, Hannah. 2018 [1958].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Arendt, Hannah. 2016 [1958]. On Revolution. London: Faber & Faber.

  2. “One can easily look at the development of the WWW—with its lightning-fast means of communication, its rapid commercialization in the mid-1990s and its accessibility to a huge audience—in relation to this notion of the metropolis. […] In an environment like this, the number of possible contacts for each person has grown far beyond what could be expected in a large city. Yet just like in a large city, the Internet’s anonymous structures have resulted in impersonal modes of communication.” Knopf, Dennis. 2009. “Defriending the Web.” In Digital Folklore, edited by Dragan Espenschied and Olia Lialina. Stuttgart: Merz&Solitude.

  3. McNeil, Joanne. 2020. Lurking: How a Person Became a User. New York: MCD.

  4. “Agency.” Merriam-Webster.com Dictionary.

  5. Bridle, James. 2019. New Dark Age: Technology and the End of the Future. London; Brooklyn, NY: Verso.

  6. The notion of user is clearly a reductive one, but that’s not much because it sees the agent only in functional terms (e.g. usability). The real reduction has to do with positioning such agent only within the computer system, while they inhabit more systems at once. Nobody would be surprised by a computer user who cries on Skype, laughs while reading a silly wifi name, or gets mad at the blue screen of death. In this sense, the Augustinian fruor (enjoyment) happens within utor (use). Thanks to Salvatore Iaconesi who encouraged me to think along these lines.

  7. Manovich, Lev. “How Do You a Call a Person Who Is Interacting with Digital Media?” Software Studies Initiative (blog), July 19, 2011.

  8. Kay, Alan, and Adele Goldberg. “Personal Dynamic Media.” Computer, 1977.

  9. Galloway, Alexander R. The Interface Effect. Cambridge, UK; Malden, MA: Polity, 2012.

  10. Lialina, Olia. “Turing Complete User,” 2012.

  11. Bratton, Benjamin H. The Stack: On Software and Sovereignty. 1st edition.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6.

  12. Private conversations via mail, phone, XMPP chat, telepathy.

  13. Satchell, Christine, and Paul Dourish. “Beyond the User: Use and Non-Use in HCI.” In Proceedings of the 21st Annual Conference of the Australian Computer-Human Interaction Special Interest Group: Design: Open 24/7, 9–16. OZCHI ’09. New York, NY, USA: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2009.

  14. “But creative thought and essentially repetitive thought are very different things. For the latter there are, and may be, powerful mechanical aids”. Bush, Vannevar. “As We May Think.” The Atlantic, July 1, 1945.

  15. Illich, Ivan. Tools for Conviviality. London: Marion Boyars, 2001.

  16. Licklider, J. C. R. “Man-Computer Symbiosis.” IRE Transactions on Human Factors in Electronics HFE-1, no. 1 (March 1960): 4–11.

  17. Kay, Alan. “User Interface: A Personal View.” In The Art of Human-Computer Interface Design, edited by Laurel Brenda, 191. Reading: Addison-Wesley, 1989.

  18. Carter, Shan, and Michael Nielsen. “Using Artificial Intelligence to Augment Human Intelligence.” Distill 2, no. 12 (December 4, 2017): e9.

  19. Wiener, Norbert.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New edition. New York, N.Y: Da Capo Press, 1988.

  20. Merchant, Brian. “The Father Of Mobile Computing Is Not Impressed.” Fast Company, September 15, 2017.

  21. Espenschied, Dragan. “Where Did The Computer Go.” In Digital Folklore. Lialina, Olia and Espenschied, Dragan (eds.). Stuttgart: Merz&Solitude, 2009. Espenschied is also the one who developed the footnote display system used in this webpage, which is the best solution I could find for showing footnotes on both big and small screens.

  22. The discreteness of keyboards resonates with decision-making and therefore action. “I choose a key, I decide on a key. I decide on a particular letter of the alphabet in the case of a typewriter, on a particular note in the case of a piano, on a particular channel in the case of a television set, or on a particular telephone number. The President decides on a war, the photographer on a picture. Fingertips are organs of choice, of decision.” Flusser, Vilém. 2017. “The Non-Thing 2.” In The Shape of Things: A Philosophy of Design. London: Reaktion Books.

  23. Saylor, Michael J. 2013. The Mobile Wave: How Mobile Intelligence Will Change Everything. Hachette UK.

  24. Handley, Lucy. 2019. “Nearly Three Quarters of the World Will Use Just Their Smartphones to Access the Internet by 2025.” CNBC, January 24, 2019.

  25. “Demographics of Mobile Device Ownership and Adoption in the United States.” n.d. Pew Research Center (blog). Accessed January 19, 2021.

  26. Or “mainstream computing”, “computer convenientism”, “the valley of wretched conformity”, “Californian cloud consensus”… These are some of the terms people came up with when I tried to explain my trouble defining the contemporary computer culture, which can be understood as monoculture despite its apparent diversity and plurality. The full list is here.

  27. It’s worth pointing out that coders themselves help maintaining such class division. " I’ve noticed that when software lets nonprogrammers do programmer things, it makes the programmers nervous. Suddenly they stop smiling indulgently and start talking about what ‘real programming’ is. This has been the history of the World Wide Web, for example. Go ahead and tweet ‘HTML is real programming, and watch programmers show up in your mentions to go, ’As if.’ Except when you write a web page in HTML, you are creating a data model that will be interpreted by the browser. This is what programming is." Ford, Paul. 2020. “‘Real’ Programming Is an Elitist Myth.Wired, August 18, 2020.

  28. Kay, Alan, and Adele Goldberg, op. cit.

  29. Graham, Paul. 2001. “The Other Road Ahead” (blog). September 2001.

  30. https://www.google.com/reader/about/.

  31. Arcangel, Cory. 2009. “Everybody Else.” In Digital Folklore, edited by Olia Lialina and Dragan Espenschied. Stuttgart: Merz&Solitude.

  32. The account of Arcieri has been then suspended. Twitter’s reply to him: “We tested for bias before shipping the model & didn’t find evidence of racial or gender bias in our testing. But it’s clear that we’ve got more analysis to do. We’ll continue to share what we learn, what actions we take, & will open source it so others can review and replicate.” Another user’s suggestion: “Here’s an easier way: Take the middle of the picture. That’s it. No bias.”

  33. Given the history of racist bias in optical devices, it is legitimate to suspect that there is a racist component here as well. See Bridle, James. 2019. New Dark Age: Technology and the End of the Future. London; Brooklyn, NY: Verso. Pp. 143-144.

  34. I’d like to thank Joseph Knierzinger for pointing this case-study to me.

  35. Stiegler, Bernard. 2016. Automatic Society. Vol. 1: The Future of Work. Cambridge: Polity Press.

  36. Zuboff, Shoshana. 2020.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New York: PublicAffairs.

  37. Ventura, Raffaele Alberto. Radical choc: ascesa e caduta dei competenti. Torino: Einaudi, 2020. Translation mine.

  38. For instance, according to Max Weber there is no full understanding of capitalism without the inclusion of economic rationalization. Cfr. Weber, Max.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Wilder Publications, 2018. Preliminary note.

  39. McNeil, Joanne. op. cit.

  40. Pascal Deville, who founded Brutalist Websites, speaks of brutalism as “a reaction by a younger generation to the lightness, optimism, and frivolity of today’s web design.” Besides the pervasiveness of cute corporate illustrations, I struggle to see much lightness and frivolity in today’s web design. And to a certain extent, I notice more optimism in what Deville would call brutalist websites than elsewhere. The websites collected by Deville are too diverse to derive from them an understanding of what brutalist means. It might simply be that the label is stronger than the content.

  41. Carpenter, J. R. 2015. “A Handmade Web.” March 2015.

  42. Lorusso, Silvio. 2015. “In Defense of Poor Media.” Post-Digital Publishing Archive. May 27, 2015.

  43. “Neither the”Under Construction" sign nor the idea of permanent construction made it into the professional web. The idea of unfinished business contradicts the traditional concept of professional designer-client relations: fixed terms and finished products." Lialina, Olia. 2005. “A Vernacular Web. Under Construction.”, art.teleportacia.org, 2005-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