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패권을 장악하는 시대에 진정으로 반문화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플랫폼을 배신해야 한다. 이는 공적인 온라인 자아를 배신하거나 버리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구글에서 '반문화'를 검색해보라. 이제는 60세가 훌쩍 넘었을 젊은이들의 흑백 사진이 압도적으로 나올 것이다. 이 사진들에서 그들이 무엇에 반대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다. 정장 차림에 하얀 피부, 짧은 머리의 남성은 편향적으로 지배적인 문화 규범을 상징했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개인의 표현은 가장 가치 있는 화폐의 형태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반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과거의 패권 세력에 대한 대안을 묘사한다. 마치 백인이자 중산층, 프레피의 옷차림이 오늘날 권력의 규범에 맞게 여전히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구글에 반문화를 검색한 결과
구글에 반문화를 검색한 결과.

거대 기업체가 우리가 선출한 정부보다도 더 깊이 조직한 시대에 맞서서, 새로운 문화는 단일하거나 하향식이 아니어야 한다. 이는 뿌리 줄기 같이 논바이너리이며,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디지털 생태계(다른 말로는 GAFA스택이라고도 함)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디지털 플랫폼이 기존의 반문화 활동을 수익성이 있고 참여도가 높은 콘텐츠로 전환함에 따라, 반문화적이 된다는 말은 더이상 패권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되지 못한다.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화의 공간인 인터넷이 사용자의 개인적인 표현과 정치적 견해로부터 수익을 창출할 때, 펑크족, 고스족, 개버 또는 신이교도들에 의해 뒤집힐 수 있는 논리는 뭐가 될 수 있는걸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비방과 심한 욕설은 당시 큰 사회적 위험, 즉 반진보적인 이데올로기와 시장 회복으로 고상떠는 보수파를 물리치는 데 꽤나 잘 먹혔다. 예를 들어 미국 국기 들보를 입은 음악가 GG Allin이 청중과 싸우고 "널 강간할거야"라는 이름의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전 무대에서 똥을 쌌던 것, 혹은 예술가이자 노이즈 음악가인 Boyd Rice가 십대 잡지 Sassy의 네오 나치에 대해 다루는 기사를 위한 1989년 사진 촬영이 있던 자리에서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American Front의 창립자와 포즈를 취하고 이를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을 좀 보라.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전의 사이키델릭한 히피족과 같이 이 예술가들은 패권적 압박을 방해하기 위해 문화를 사용한단 점에서 말그대로 반문화적이었고, Allin과 Rice의 경우에는 신자유적인 "책임화"를 방해하기 위해 그러했다.

보이드 라이스가 백인 우월주의 단체 아메리칸 프론트의 창립자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Boyd Rice가 백인 우월주의 단체 아메리칸 프론트의 창립자 Bob Heick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그런데 오늘날의 온라인 공간에서 이 전략은 무너진다. 2018년 NYC 갤러리에서 시각적으로 무해한 추상 회화 전시를 열면서 다시 주목을 받은 Rice는 수십년이 지난 Sassy에서의 자기 모습이 오늘날의 검열에 걸려 논란의 중심에 섰음을 빠르게 발견했다. 늙다리 펑크족인 그는 분노로 들끓는 관중에 빙긋 웃었다. 그는 Artnet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뉴욕시에게 너무 위험해." 그러나 그는 인터넷에게 너무 위험하진 않았다. 그의 작업과 삶, 그리고 갤러리스트의 도덕적 나침반에 대한 팽팽한 논의가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Rice는 온라인에서 관심을 얻는데에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 패권은 그리 민주적이지 않다. 이는 참여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그것이 초래하는 사회 환경적 피해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준 정부의 떼가 주도하는 형태이다. Zuckerberg, Bezos, Thiel, 및 기타 테크놀로지 거물들은 자신들이 공공 법률이나 정책에는 책임이 없다고 우리에게 상기시키는데 잽싸다. 그들의 제국은 시장 자유주의의 "평화로운 메커니즘"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사회는 자유 의지에 따라 그들의 도구와 공간에 적응해왔다. 압박을 받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플랫폼이 이전 세대의 반문화적인 요구를 어떻게 반영하는 지 지적할 것이다. 자신들은 큰 정부와 수직적 기업 문화를 회피하면서 개인적인 성취와 평평한 조직 구조를 장려한다며 말이다. 오늘날 당신은 코더이면서 DJ가 될 수 있으며, 우버 드라이버이면서 여행 블로거가 될 수 있고, 실리콘 밸리의 수트를 입고 버닝맨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화의 공간인 인터넷이 사용자의 개인적인 표현과 정치적 견해로부터 수익을 창출할 때, 펑크족, 고스족, 개버 또는 신이교도들에 의해 뒤집힐 수 있는 논리는 뭐가 될 수 있는걸까?

새로운 권력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미끄럽다. 가장 상징적으로 나돌곤 하는 말이 거대 기업에 가면 가방 없이 검정 터틀넥과 파타고니아 플리스 자켓을 입은 사람들을 보기 쉽다는 것이다. 행진과 궁전, Viktor Orbán, Kim Jong-un, and Donald Trump 처럼 배 둘레가 큰 오늘날의 거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관중속에서 시각적으로 분간해내기 힘들게 유연하다. 오늘날의 권력은 미니멀리즘, 절제, 편안함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위협을 받을 때만이 권력은 힘을 물리적으로 과시한다. 실질적인 권력은 더 적은 권력으로서 보여질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을 제어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이 500K개의 좋아요를 득표한 것을 축하해봤자 @jack이 여전히 당신의 모든 트윗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질적인 권력은 낮은 프로필을 유지한다. 실질적인 권력은 소셜 미디어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권력은 소셜 미디어를 소유한다.

최근 몇년 동안, 사용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알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문화라는 용어는 여전히 래퍼 Tekashi 6ix9ine와 같은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그의 악명은 성범죄와 살인 의혹 등의 사회의 규범을 깨는 범죄에서부터 자신의 형을 줄이고자 동료 갱 맴버를 고발하는 등 거리의 묵언 규범에 이르러 그를 슈퍼스타덤에 끌어 올렸다. 그가 놀랍게도 감옥에서 갑자기 풀려나며 깜짝 발매한 트랙인 “Gooba”는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조회된 랩 동영상이 되면서 유튜브 역사를 갱신했다. 같은 날 200만 명의 동시 사용자가 그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시청했고 그는 휴대전화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고백했다. "난 남을 일러바쳤고, 속였어. 그런데 난 누구에게 충성해야 되는거지?" 이내 VVS 다이아몬드를 번쩍이면서, "난 유튜브를 싹쓸이했지. 난 한시간에 500만 조회수를 차지해. […] 나라는 비겁자가 너보다 더 많은 숫자를 해낸다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하지만 6ix9ine의 자기 충성심 뒤에는 플랫폼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 Alphabet 및 Facebook, Inc.의 주주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충성심이 있다. 여기가 이제 까다로워지는 부분이다. 기술이 패권을 장악하는 시대에 진정으로 반문화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플랫폼을 배신해야 한다. 이는 공적인 온라인 자아를 배신하거나 버리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기술이 패권을 장악하는 시대에 진정으로 반문화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플랫폼을 배신해야 한다. 이는 공적인 온라인 자아를 배신하거나 버리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6ix9ine은 하위문화적이지만 반문화적이지는 않다. 그에 비해 에드워드 스노든과 같은 사람은 하위문화적이지 않지만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반문화적 인물에 가장 가깝다.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미국 정부 하청인이었던 스노든은 거대 기업의 급격한 권력 확장을 보고 2013년 NSA가 주요 테크 플랫폼과 불법적인 계약을 체결하여 전 세계 사용자의 개인 이메일, 통화 기록 및 "인터넷에서 있는 거의 모든 것"의 캐시를 가로채는 것을 폭로했다. 스노든의 내부 고발은 개인의 거대한 타협을 낳는 새로운 패권의 주된 차크라를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완전한 반문화는 아니다.

래퍼 6ix9ine의 초상사진
래퍼 6ix9ine. "난 유튜브를 싹쓸이했지. 난 한시간에 500만 조회수를 차지해. […] 나라는 비겁자가 너보다 더 많은 숫자를 해낸다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반문화는 단체를 필요로 한다. 세상에 반하는 우리. 그리고 인터넷은 집단적인 반대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구에 대해 내재적으로 사회 진보적인 것은 없다. Extinction Rebellion은 반문화적인 정신을 가졌지만 QAnon도, 무장한 우익 자유주의자 Boogaloo Boys도, 유럽에서는 오늘날 독일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치 독일을 계승한 제3제국의 국민이 되길 청하는 Reichsbürger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시대의 특정적인 진실은 권위에 대한 반대가 이젠 더 깊은 패권 세력에 의해 매우 자주 추진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이 많은 젊은 이들 사이에서 (Greta Thunberg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현 지도자들과의 싸움에 덜 집중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일 것이다. 마스터 도구를 사용하여 마스터의 집을 해체하려고 하는 시도 대신에, 암호를 모아 마스터의 에어비엔비를 예약하고 그곳에서 찾은 도구를 사용하여 마스터가 결코 살 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자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이 반미래 공예의 중심에는 환경 붕괴가 임박했다는 강력한 믿음으로 기존의 모든 통제 시스템을 쓸모없게 만든다. 꽤 말이 된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거나 보이콧하기에는 사회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부식성있는 체계란 너무 광범위하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반대한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라. 또 다른 핵심 요소는 Z세대가 웹 1.0 사이트인 PoliticalCompass.org를 재발견 한 것이다. PoliticalCompass.org는 웹 1.0사이트로, 사용자가 동일시하거나 비동일시하도록 요구받는 여섯개 세트의 변수를 통해 좌파에서 우파,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의 X/Y 축에서 사용자의 대략적인 위치를 산출해낸다.

지난 몇 년 동안 Z세대의 온라인 정치적 표현의 발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아티스트 Joshua Citarella는 "e-데올로기e-deologies, 즉 틈새 개인 브랜딩의 형태를 한 급진적 정치"의 출현을 짚어냈다. 그는 2019년의 레포트 20 Interviews에서, Citarella는 반문화적 참여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데에는 Political Compass와 게이밍의 영향이 컸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0년대 중반 미국 정치가 대중 문화 전체를 집어삼키면서 정체성을 가지고 노는 유행”이 일어난 것에 대해 "당신의 캐릭터를 골라라 / 당신의 미래를 골라라" 라며 인용하기도 했다.

이 공간에서 찾을 수 있는 정치적 정체성 중에는 예를 들어 “테드가 옳았다Ted was right” 무정부주의적 원시주의anarcho-primitivism (anprim)가 있다. 이는 Ted Kaczynski의 산업 사회와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선언문에 따라, 사람들이 수렵 채집인으로 재숙련되어 더이상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일상적인 생존을 통해 성취를 추구하는 농경 이전 사회로 돌아가기를 추동한다. 이것이 너무 변칙적으로 들린다면, 유튜브 채널 원시적 테크놀로지Primitive Technology의 1,030만에 이르는 구독자 수를 고려해보라. 이 채널은 "현대적 도구나 재료 없이 완전히 처음부터, 완전히 야생으로부터" 건물을 건설하는 튜토리얼들이 있으며 "현대적 기술을 이용하지 않고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지" 보여준다. 물론 이 튜토리얼 비디오를 스트리밍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는 제외하고서.

유튜브 채널 원시적 테크놀로지에 게시된 자연 화로 만들기 튜토리얼 영상의 스틸컷.
유튜브 채널 원시적 테크놀로지Primitive Technology에 게시된 자연 화로 만들기 튜토리얼 영상의 스틸컷.

이러한 e-데올로지의 이름은 환상적이고도 문자 그대로인 경향이 있다. "포스트 문명주의자"는 문명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면 최적의 인간 생존이 어떤 모습일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반면 "자발적 포스트 농경주의자"는 무정부적 원시주의 기술을 가치 있게 여기나 이를 선택적인 농업 공동체를 통해 지속되는 문명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여길 것이다. 나침반의 다른 영역에서 기술의 완전한 수용이 인류를 희소성, 생태적 변동성, 자원 경쟁에 수반되는 사회적 질병으로부터 구하는 곳, 즉 "완전히 자동화된 럭셔이 게이 공간 공산주의" 와도 같은 것을 발견한다. 혹은 기독교의 미덕을 지지하듯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에 믿음을 두는 반항적인 신전통주의, "기술 관료주의"와 같은 것을 발견한다. e-데올로지는 밈, 틱톡 게시물, 트위치 라이브 스트리밍이나 유튜브 토론을 통해 게시판과 소셜 미디어에서 다뤄지며, 이 모든 것은 상당히 거슬릴 수 있다. "에코 패션 글로벌 대량 학살"이나 "백인 민족주의 분리"에 대한 요구들처럼. 그리고 아마도 여기에는, 스타일 없이 부유하는 거대 테크 기업에 대한 미학적 반대가 있다. 래디컬 밈 문화에서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금지 구역이 자유 진영이 되며, 이 문화는 격렬하고도 지저분한 기호학의 붕괴를 맞이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이 활동의 대부분이 아바타와 가명, 그리고 실제 생활에 기반한(IRL) 주체와 온라인 페르소나 사이의 직접적인 경계가 거의 명확하지 않은 채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가장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틈새 개인 브랜딩"은 게임이다. 계정에서 미친 짓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보자는 셈이다. 플랫폼이 계정을 차단시키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기후 변화는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통 관심사이지만, 그들의 반응은 반문화적이라기 보다는 경쟁적 미래주의자로 더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방대한 상상력의 범주를 가진 Political Compass의 입장이 보여주듯이,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또는 무엇을 반대하는 지에 대한 합의는 거의 없다. 이는 글로벌 위기의 복잡성으로 인해 책임 주체를 따로 놓고 보기가 극도로 어려운 이 세대에서 현명한 처사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아이폰에 부여된 네트워크 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ies에 대한 책임이 애플에게 있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중 누가 연결성을 포기하고도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여전히 괜찮을 수 있을까? 이건 마치 완전히 네트워크화된 지구에서 자란 Z세대가 반문화를 우회하여 이전의 반문화가 맞서 싸운 단일 세력보다 더더욱 히드라를 닮은 패권적 체계 앞에서 무익함을 발견한 것과 같다. 체계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활동이 단지 그 체계를 더 강력하게 만들 뿐임을 직감하면서, 다음 세대는 현재의 하부 구조를 완전히 버리고 대안적인 미래를 구축하기를, 즉 급진적인 하이퍼스티션hyperstition을 채택한다. 블록체인 기반 화폐의 급부상이나 경찰 개혁이 아닌 경찰의 완전한 폐지가 요구됨이 그러한 사례이다.

Citarella의 연구가 2016년경부터 온라인에 포스팅을 시작한 십대(2020년 당시 대략 18세였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동시대 반문화 운동의 변화하는 본질을 보다 광범위하게 추출해낸다. 반패권적인 방식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데에 익명성이나 적어도 가명이 필수는 아니지만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는 중재되지 않은 진정성과 "리얼이 되기"가 진짜 고급이었던 1990년대 실제 생활에 기반한 반문화에서의 관념과는 다르다. 지금은 "잘 팔리는지"가 당신의 온라인 정체성과 실생활, 본명을 연결한다. 이는 반문화 활동에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인 인터넷이 표현을 억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인터넷은 표현을 강요하고 당신이 몇년에 걸쳐 뱉은 말이 무슨 말이든지간에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적어도 네트워크가 당신이 존재했다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한, 플랫폼에서 침묵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이것은 눈에 보여야만이 공연과 협업을 위한 고려 대상이되는 문화 영역에서 특히나 공공연한 현실이다. 6ix9ine이 유튜브 기록을 깨는 데 그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젊고 재능있는 래퍼들이 경력을 쌓길 희망한다면 소셜 미디어 마케팅에서 그만큼 똑같이 재능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건 마치 완전히 네트워크화된 지구에서 자란 Z세대가 반문화를 우회하여 이전의 반문화가 맞서 싸운 단일 세력보다 더더욱 히드라를 닮은 패권적 체계 앞에서 무익함을 발견한 것과 같다.

우리는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되면서 일어난 격동적인 전이를 목격했으며, 1987년 "침묵 = 죽음"이라는 강력한 ACT-UP을 다시 불러온 "침묵은 곧 폭력이다" 라는 깨어있는 주장이 개개인에게서부터 심지어는 연대나 반성을 공식적으로 적시에 표현하지 못한 이후의 움직임에도 소용돌이 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공개된 게시물들은 대중에게 조사를 받거나 진정성, 오리지날리티나 어조에 따라 평가받았다. 전혀 놀랍지 않게도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검정 사각형을 디폴트로 그저 게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는 커뮤니티 리소스 공유가 매우 중요한 숭간에 정보 제공을 막음으로써 자체적으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 플랫폼은 감정의 증폭, 사용자 상호작용의 증가, 플랫폼 참여가 증가됨과 데이터 경작과도 같이 설계된 대로 정확히 작동했다. 짜잔, 플랫폼이 돈을 번다. 정말 엉망인 점은 사용자들은 플랫폼의 작동방식이 글러먹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플랫폼이 가능하게 하는 벌집과도 같은 마음의 법칙에 순종할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는 점이다.

초기 인터넷의 어두운 가장자리에서 6ix9ine, 스노든, Z세대 십대와도 같은 사람들이 있기 이전에 해커들은 공공 공유지의 폐쇄를 일찍이 예견했다. 이 사용자들은 완전히 익명이고도 극도로 연결되어 사람들이 정부의 관여없이 물리적 신체에 구여받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에, 래디컬한 자유에 가치를 두는 도덕률을 세웠다. 온라인 활동이 넷스케이프나 익스플로러, 구글과도 같은 검색 엔진을 따라 중앙 집중화되면서, 90년대 후반이나 00년대 초반에 인터넷은 "클리어넷"으로 알려진 것으로 갈라져나왔다. 클리어넷은 거대 소셜 미디어, 상업 플랫폼, 혹은 검색 엔진에 의해 긁어 모아질 수 있는 무엇이든 포함해서 공적으로 색인화된 사이트들을 포함하며, 토르와도 같은 익명의 암호회된 네트워크로 만들어졌기에 공개적으로 색인이 형성되지 않은 "다크웹", 혹은 "딥웹"까지도 포함한다. 공식적으로는 클리어넷이지만 "다크 포레스트"의 영역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하위 클리어넷 공간의 토대를 마련한 사이트도 많이 있었다. 특히 레딧이나 4chan과 같은 게시판 포럼이 그러했는데, 여기서는 사용자가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상호 작용하거나 이 활동이 실명 기반 검색 엔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중국 SF 작가 Liu Cixin의 2008년 책 제목에서 따오자면 웹의 "다크 포레스트" 영역은 모든 연령대의 사용자와 정치적 설득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료, 고용주, 국가에 노출되어야만 하는 클리어넷 영역보다 사회학적으로 스트레스가 적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제 Discord 서버를 포함해서 Substack 같은 유료 뉴스레터, 텔레그렘 같은 암호화된 그룹 메신저, 게이밍 커뮤니티, 팟캐스트, 그리고 클리어넷 메시지 게시판 포럼의 바깥이나 소셜 미디어의 바깥이 포함된다. 한 개인은 플랫폼 알고리즘이 데이터 프로필에 맞춰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기보다는 커뮤니티의 다른 사람들이 검색한 내용을 찾아내거나 공유한다. 또한, 다크 포레스트 공간은 최소한으로 그리고 간단하게 상업적이다. 일반적으로 입장료가 약간 부과되지만 일단 입장하면 이 플랫폼은 당신의 행동을 자극하거나 추가적인 가치를 빼먹으려 하지 않기에 당신은 보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염두에 두어야할 재미난 점은 다크 포레스트는 클리어넷 채널과 동일한 케이블 및 위성 어레이를 공유하고 동일한 장치를 통해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며, 또 본질적으로 모든 거주자가 클리어넷 공간에 계속해서 동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전문적인 프로토콜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따라서 전기 보급을 끊고 은신하거나off-grid "중도 철폐"dropping out하는 기존의 반문화적 개념과 유사하지 않다.

확실히 이러한 공간 중 어느 것도 순수하지 않으며 사용자는 소셜 미디어에서 튀어나와 쌓이는 정보값에 취약한 만큼 밀폐된 녹음실의 소리 반향이나 다크 포레스트에서의 급진화에도 취약하다. 그러나 어느정도 반 패권적인 잠재력을 낳는다는 측면에서 다크 포레스트는 클리어넷의 물리학(x 알고리즘이 적용될 때 콘텐츠의 중력, 속도 및 견인력)에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기에 유망하다. 수입과 지위, 심지어는 자기 가치에 대해 클리어넷에서의 인지도에 의존하는 인플루언서나 "블루 체크"들과는 다르게, 다크 포레스트에 거주하는 자들은 클리어넷의 범주에서, 혹은 코티지코어나 환경사회적 트렌드에 관계해서 실제 숲이나 공원, 정원에서 오프라인으로 그들의 주요 커뮤니티를 구성한다. 그런 다음 매우 선택적이고도 심지어는 터무니없이, 일관성없이 클리어넷의 불빛 아래에 스스로를 내보인다. Liu Cisin의 책의 핵심이 신념이다. 클리어넷이 우리를 부를 때, "대답하지마! 대답하지마!! 대답하지마!!! 네가 답변한다면, 바로 출처를 찾게 될거야. 네 행성은 침공될거야. 네 세상은 정복될거야."

그렇다면 오늘날의 반-패권적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이는’ 눈에 보여지는 것, 적어도 사람 사이 눈에 보여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가죽옷을 입고 모히칸 머리를 하고 지금은 어쨌거나 비어있는 대로를 걸어가면 별다른 스릴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 즉 관심 경제로부터, 사회의 원자화atomization으로부터, 그리고 주류 커뮤니케이션의 추출 논리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우리는 "좋아요"와 "공유"을 플랫폼이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텅 빈 소매점이나 버려진 장소, 비의적인 로컬 씬이 초대하는 버려진 장소들, 비밀을 소중히 여기는 다크 포레스트의 디지털 갱단의 확산, 문화 개체의 희소성에 대한 새로운 욕망, 즉 사람들 사이의 보다 긴밀한 연결을, 총체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진정한 반문화는 보기 어렵고, 찾기란 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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