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천은 가장 일찍 음모론적인 플롯을 문학에 도입한 작가군에 속한다. 물론 핀천이 음모론을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자의식적이어서, 사실들을 다 꿰어줄 최종적인 계시는 유보되거나(<제49호 품목의 경매>) 음모론에 몰두하는 동기를 스스로 분석하고 조롱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브이>) 그렇지만 핀천이 음모론의 쾌락을 전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핀천은 60년대 세대의 정치적 감수성에 공명하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스스로 창조해낸다.
<브이>에서는 V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정체가 모호한 인물을 추적하면서 유럽 제국주의의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을 공식 역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현하고,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엘리자베스 조의 한 극작품을 주된 단서로 삼아 유럽에서 건너온 미국의 지하 우편 시스템의 존재를 탐색하는 좀 더 본격적인 음모론적 플롯을 선보인다.